구곡산/02.02.24[일]
[산행지/일시]: 구곡산957.5/02.02.24[일] [소재지]: 경남 산청 [지형도]: 산청 5만 [산행구간] : 10.1k 덕산서원<2>도솔암<1.2>구곡산957.5<3.4>천잠삼거리<1.1>천잠<2.4>동당마을
[구간별 시간] * 청학동...너무나도 다 잘 알고 계시리라...
* 삼신봉...내삼신봉... 그 곳에 서면 지리산의 주능선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곳 인디... 조금 아쉬움은 남지만 처음 오신님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가져 가신다면 다음에 그곳을 찾는 재미가 ... 약간의 아쉬움은 있어야.. 아니면 우리 회원들 중에서 뭔가 못된(?).. 전부 가슴에 손을 올려 보시라~요(여인천하의 옥매향식..역사의 기록은 조금 후 벌어지는 '을사사화'의 원인중의 하나가 임백령과 윤임이가 옥매향을 사이에 두고 개인 감정이 파벌 싸움으로 번졌다고... 그런데 지금의 분위기는 옥매향이 아닌 다른 아이가... 옥매향의 역을 맡은 연기자가 혹시 출연거부? 아무리 드라마라 해도 사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만데...방송작가들의 역사인식에 문제성...? 지금은 임백령이 강직하게 외척으로부터 거리를 두지만 결국 임백령은 소윤-윤원형-의 오른팔 역할을 담당. 그러하기에 대윤-윤임-과 매향을 두고...또 방향이...죄송)
풍수학적으로 보면 명당터가 있고 그것을 구성하는 조건이 조산-진산-외청룡-외백호-내청룡-내백호 ...뭐~ 이런식의 구성이 된다하더라구요.
* 불일폭포... 지리 10경 중의 하나다(지리 10경은 재고의 여지가 많다. 최화수의 지리산 365일(4권/나남출판-지금은 서울의 어느 출판사, 서점을 뒤집어도 없음-구해진다면 몇배의 가격을 달라해도 저에게 팔아주세요. 2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잃어버리고 부대서점을 통해서 2권 하나만 서점에 구해놓은 상태)이란 책을 참조하면 10경이 정해지기까지의 자세한 내용이 수록(또는 '지리산지기?'이란 다움 카페를 찾아가면 최화수님의 지리산 칼럼이 올라옵니다)
그곳은 티엘님의 말씀처럼 예전의 물이 넘쳐나던 물줄기는 아니지만 백학봉과 청학봉의 두 봉우리 사이에서 떨어지는 60여 미터의 폭포는 남한에서는 두 번째로 큰 폭포로 물이 마르는 법이 없다했는디.. 몇년전 하도 가물어서 불일의 물이 마른 적이 있었지요.
그 물줄기의 밑으로 나있는 골짜기 아래, 사람들이 근접하기 힘든 곳에 최치원 선생이 수도했던 수도터가 바위틈 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수도터에는 비밀스런 길이 있는디 그 길이 가야산 홍류동 계곡과 연결이 되어있다네요.
* 불일평전.. 폭포에서 쌍계사로 내려오면 한 채의 집을 발견하는데 그곳을 이르는 말이다.
그 평전의 소망탑 맞은편으로 보이는 나즈막한 봉우리가 있다.
그리고 그 마당에 보이는 연못의 모습이 보신분들 아시겠지만 우리 국토의 모습이란 것이죠. 선생은 그 연못을 만들고 매일 통일을 기원한답니다.
또한 그 집은 원래는 한 채였는데 도올 김용옥(우리에게는 텔레비젼의 노자를 말한다로 알려진...)이 고려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양심선언을 하고서는 교수직을 사임하면서 삭발을 하고, 변선생에게 들어와서 기거할 곳을 부탁을 했더니 선생이 한 채를 더 지었는데 도올이 오지를 못하고, 대신 자기의 아들이 아버지를 도와 준다고 여름캠프장을 돌보다가 광주에서 왔던 대학생과 눈이 맞아서 신혼살림을 차렸던 곳이지요.
* 차보급 기념비.. 일주문을 지나서 매표소 직전 오른쪽 숲 속의 바위 위에 있는 탑으로 차라 하면 보성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보성의 차는 일본으로부터 들어 온 것이고 하동, 쌍계사를 중심으로 전통차가 자생한다는 것으로 들었다.
* 하계동천... 쌍계사를 끼고 흐르는 그 앞개울. 이 개울은 허만수님이(진주사람으로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를때 2번째 매표소 옆에 보면 님을 추모하는 비석이 있다) 가장 아끼던 곳이란다.
녹조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식수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예전에 지리산 갔다오면서 늘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서 빨가벗고 멱을 감던 기억들이 난다--
지금은 대형 호텔처럼 떡 버티고 서있는 세석산장(산장맞나?)이지만 예전의 낡은 사진으로 보는 세석산장의
모습은 그냥 들에 있는 나무를 잘라서 얼기설기 엮은 아주 조그만 움막이었음을 알수있다.
그 세석지기가 허만수님이었다고.. 전쟁직후의 일이라 당시에는 술 먹고 님에게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도 많고 그러했다네요. 그리고 아내가 3번이나 가족에게로 가자고 권유하러 왔지만 결국은 실패를 했다는군요... 무엇이 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지리산에 애착을 가지게 했는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님의 모습이 세석에서 뿐만 아니라 지리산에서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네요.
해서 님이 사라진 사건에 대해서 님의 말버릇처럼 칠선의 신선이 되었다는 설과 말년에 이런저런 고민들을 사람들에게 토로했던 점. 그리고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는 술에 취해 있는 날들이 많았던 점. 등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개울이나 어디에 자살 또는 실수로... 어쨌거나 님의 마지막을 아는 이는 없고, 단지 그분을 기리는 의미에서 칠선의 신선이 되어서 생존시처럼 지리산을 찾는 이들의 등불이 되어주고 있다고 .. .. * 밥을 먹고 내려오다가 길 양쪽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가 있는디 이것이 '쌍계 석문'이란 것인디.. 최치원 선생의 필치라네요. 내도 쓰는걸 보지못해서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 덕산(德山: 중산리 들어서기 전 대원사와 갈리는 지점 마을. <2월 정기산행 구곡산으로 갔던 마을의 덕산서원이 있던 곳>이란 곳은 조선시대 사림의 자존이며 끝끝내 정계에 진출하지않고 문정왕후가 벼슬을 제수 했을 때에도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서 명종이 현군이 되지 못함은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치마폭에서 놀아나기 때문이라고 직언을 서슴없이 내 뺃었던 남명 조식이 이름을 지었다고..
그리고 선생은 지리산을 17차례 등산을 한 후(당시는 들머리가 남명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산천제에서
시작해서 천왕봉까지 14박 15일이 소요 됨.-속두류록-) 잘모르겠지만 실천에 바탕을 둔 '아는 것을 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그리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얘기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고자 했다죠. 그의 문하에서 곽재우, 정인홍를 비롯한 의병장만 60여명이 배출되었던 것이죠. 또한 선생은 실제로 군사학을 정식 과목에 포함을 시켜서 가르쳤다는 것이죠. 나중에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에 의해 실각을 하기는 하지만...
유홍준 선생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디..꼭 이것이 뭐고 저것이 뭐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꺼? 자연과 함께 잠시라도 호흡을 할 수 있고, 자연의 거창함과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연의
섭리들처럼 많은 욕심없이 때가 오기를 기다려 줄줄도 알고,,,
모두들 아는 내용들을 한번 쭈~욱 훑어 보았네요. 산행기도 아닌 산행기였음다... 모든 님들 수고하셨고 앞으로의 멋진 산행을 꿈꾸는 청산이었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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