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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02.11.10

청산-김세열 2006. 2. 13. 19:42

[산행지/일시] : 가야산/02.11.10

[산행자] :

 

[소재지] : 합천 야로면 구원리

[산줄기 개념] :

 

[산행구간] :

구원리[국립공원표지석]<>순천박공 묘<>능선삼거리<>가령고개<>칠불봉<>상왕봉<>해인사

[구간별시간]

08:15 : 부산 출발

10:45 : 야로면 구원리 마을 하차(국립공원 표지석이 서 있는 곳)

11:20 : 첫 번 능선(논이 끝나는 지점. 바위에 화살표 표시)

11:30 : 순천박공 묘 통과

11:45 : 주능선.

12:05 : 능선 끝(주의해야하는 구간)

12:20 : 능선 삼거리 도착/13:05 : 식사 후 출발

13:25 : 가령고개(제법 넓은 공터) 백운동(우). 상왕봉, 칠불봉(직진)

14:05 : 칠불봉 정상(1,433)

14:25 : 상왕봉(우두봉) 출발-칠불봉과는 0.2K 거리.

15:30 : 해인사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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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 : 부산 출발

10:45 : 야로면 구원리 마을 하차(국립공원 표지석이 서 있는 곳)

들머리- 마을로 들어서기 직전 삼거리다. 왼쪽 시멘트 길을 올라가다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논 사이로 경운기 다니는 길을 따라 산으로 간다.

논이 끝나고 산이 이어지는 곳에 무덤이 한기 있었던 곳의 바위에 하얀색 페인트로 산으로 가는 방향 표시가 있다. 길은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은 듯한 오솔길이다.(아마도 이 길이 조금 지나 첫 능선에서 만나는 지점인 듯 하다)

이 능선길을 버리고 직진하는 경운기 길로 갔다. 길이 끝나면서 작은 개울을 만난다. 여기서 직진하면 계곡으로 오르고, 개울 건너 산으로 오르면 능선으로 오른다.

이 개울 길은 시작부분은 좋아 보이지만 조금 후 무덤을 지나면서부터는 상당히 가파르며 사람들의 흔적이 거의 없다.

어느 길을 선택하던지 상관없이 10여분 뒤 능선의 안부에서 만나기 때문에 계곡길이건 능선길이건 상관없다.

두 길이 만나는 안부는 사거리다. 직진하는 길은 주능선을 오르는 길이고, 우측 내리막길은 백운리 방향인 듯 하다.


11:20 : 첫 번 능선(위에서 말한 논이 끝나는 지점. 바위에 화살표 표시)

여기서도 직진해서 능선을 가도 되고 약간 왼쪽으로 틀어서 편한 길을 가도 5분 여 후에 안부 직전에서 만나기 때문에 어느 길이던 상관없이 자신의 체력에 맞게 선택해서 가면 된다.


11:30 : 순천박공 묘 통과

안부(사거리) 지나서 또 하나의 무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11:45 : 주능선.

여기서부터는 길이 제법 편안하다 싶다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암벽이 가로막고 선다. 암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으로 지팡이를 짚고 가는 것보다는 배낭에 넣고 네발로 가는 것이 좋으리라 본다.

길은 힘들지만 좌우로  펼쳐지는 조망은 어느 산에서도 보기 힘들게 아주 좋다.

우측으로 백운리, 동성재(?)방향으로 암벽이 늘어섰고, 좌측으로 야천리 방향, 매화산쪽 조망과 앞쪽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낭떠러지 계곡, 그야말로 공룡의 등에 올라서 호령하는 중세기 기사가 된듯하다(사실은 약간의 돈키호테 성향을 지닌 기사?)


12:05 : 능선 끝(주의해야하는 구간)

여기는 지난주에 내린 눈인지 아직도 잔설이 녹지 않고 조금 남아있다.

우측 산사면 산죽길을 따라서 앞에 보이는 능선을 이정표를 삼아서 이동을 해야한다.

물론 능선을 타고 이동을 해도 되지만 길이 거의 없고 우측으로 산죽이 있는 경사가 비스듬한 계곡으로 내려가서 돌무더기가 약간 있는곳을 잠시 오르면 안부가 나타난다. 


12:20 : 능선의 안부 삼거리 도착/13:05 : 식사 후 출발

우측으로 방향을 잡는다. 오르막이면서 바위들이 보인다.

저 멀리 가야산 정상인 상왕봉(우두봉)이 눈에 들어온다. 길이 헛갈릴 때는 여기서부터는 정상을 이정표 삼아서 가면 무난하게 갈 수가 있다. 능선에 올라서서 1시 방향으로 나무 사이로 자세히 봐야 상왕봉이 보인다.

오르는 길에는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여기서부터는 바윗길이라 통과하는 길이 약간 상그럽지만 길은 확연히 나 있고, 능선길이라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


13:25 : 가령고개(제법 넓은 공터) 백운동(우). 상왕봉, 칠불봉(직진)

이곳에서 정상을 앞둔 철계단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지다가 정상을 앞두고서는 암벽에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몇 번의 철계단을 오르자니 다리가 힘들다고 난리다.


14: 05 : 칠불봉 정상(1,433)

막바지 계단을 밟고 서니 이제껏 불던 바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바람이 불어 닥친다.

아무에게나 정상을 내어주기가 싫은가보다.


칠불(七佛) 그야말로 일곱 부처다. 김수로왕의 7왕자가 수도 끝에 성불하여 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 첫째는 왕위를 잇고, 셋째에게는 왕후가 부탁하여 자신의 성씨를 주기를 간청해서 허씨의 성씨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 셋째로부터 김해 허씨가 비롯되었다고...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의 성불 전설은 지리산에도 그대로 전설로 남아있다. 칠불사가 바로 그 일곱 아들이 수도하고는 성불을 이루었다는 전설을 가진 절이고, 천왕봉의 천왕성모(지금은 천왕사에 모셔져 있고, 그 모형을 만들어서 중산리 주차장 맞은편 공터를 다져서 그곳에도 모셔 둠)가 지리산의 여신이고, 그리고 그 여신이 역사적 인물로 보면 허왕후라는 설. 왕후에게 제사를 모시던 곳이 노고단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 일곱 부처가 보호하는 곳이 이곳 가야산 해인사라 감히 삼재가 들지 못하는 천하의 길지라고 하는 것은 어디라도 자신들 마음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상형을 꿈꾸던 소박한 백성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은 어디에다 자신들의 이상향을 심어놓고 살아가고 있는지....


14:25 : 상왕봉(우두봉) 출발-칠불봉과는 0.2K 거리.

한눈에 주위가 다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아직도 내린 눈들이 거의 녹지를 않고 있어서 묘한 기분을 준다. 앞뒤가 서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동시에 쳐다보면서 세상도 사람도 모든 자연이 이런 양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을진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이 어느 한쪽만을 고집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15:30 : 해인사 도착.

삼재 부도처(三災不到處). 영조 때의 지리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경상 일대에 암석으로 된 화산(火山)이 전무한데 오직 가야산만이 바위가 줄줄이 이어져 그 형태가 불꽃이 하는로 솟아오르는 듯 지극히 높고 수려하며, 홍류동과 폭포, 너럭바위가 수십  리 뻗쳐 있고, 최고운이 여기서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어 간 곳을 모른다고 한다(전설은 여기서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고 함) 임진왜란때 금강산, 지리산, 덕유산, 속리산이 모두 왜군이 들어왔지만 소백, 오대, 가야산은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지리적으로 경상, 전라의 도계에 가까운 내륙에 위치하며 공격받기 쉬운 협곡으로 연결되므로 굳이 위험을 무렵쓰고 침략군이 들어올 이유가 없었겠지만 서민들의 마음은 정확히 원인을 찾아보는 것보다도 자신들의 고장이 왜군들의 칼날아래 들어가지 않은 이유를 절대적 힘에 의해서 보호받았다고 애써 믿고 싶었으리라. 그것은 또 다른 전란에서도 자신들은 절대자의 힘에 보호아래 지내고 있음으로해서 자신들의 삶터가 절대적 안식처임을 믿고 스스로 위안 삼아서 살고자하는 소박한 꿈이 담긴 해석이 아닐까?


하지만 이 야로 지역은  거창과 장수에 이어져서 후백제와 연결되고, 해인사는 왕건의 세력기반이었던 직지사와 연결되어 있어서 양대 세력의 대치는 불가피했던 그래서 해인사 승려들도 남악파와 북악파로 갈리어 견훤과 왕건 세력을 업고 세력 다툼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신라 왕실의 대표적 화엄십찰의 하나인 해인사에 진성여왕의 간부였던 위홍의 위패를 모시자 이에 민중들의 반발로 승려들이 전사하고 그 승려들의 명복을 빌고자 묘길상탑을 세우기도 했으며, 숙종 이후 영.정조, 고종 때까지 무려 7차례나 화재가 장경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소실되는 수난도 겪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장경각의 팔만대장경판 뿐만 아니라 유달리 명필 현판이 많은 것도 특이하다. 일주문의 글씨만 해도 조선말의 3대 명필로 꼽히는 김규진(그림에도 뛰어나서 안중식<장승업의 스승>과 함께 말경 양대 산맥을 이룸. 카메라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여온 사람. 청강 김영기란 화가의 부친)의 작품으로 단아한 해서체로 명필로 꼽는다. 그 외에도 대적광전은 뒷면에 대방광전과 금강계단이란 현판이 삼면으로 있다. 이 글 역시 해강 선생의 필적이고, 이런 예는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예이니 과히 문자의 천국을 이룬 곳이 해인사다. 그 뿐만 아니라 김정희의 수제자 위당 신관호의 작품이며, 근대의 명필들의 작품을 한 점씩은 주련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곳이 해인사다.


이런저런 문화재를 눈이 짧아서 다 알아 볼 수는 없고, 단지 현대의 최고의 고승이라 말하던 성철 스님이 머물렀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스님의 뜻인지 뜻과는 무관한지는 모르겠으나 스님이 머물던 암자에 예전에 올랐을 때는 오르는 순간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청들(그 암자의 단청은 화려하기 그지없이 금분으로 단청(엄밀히 단청이라 하면 잘못 표현이지만)이 스님의 높은 정신을 너무도 세속화 시킨 듯해서 입맛을 씁쓸하게 했다.


그러나 세상사 음이 있음 양이 있다고 했던가. 스님들의 새벽예불 소리는 그 어느 합창보다도 아름답다고 밖에 표현을 못하겠다.